WithUNI dialog

June 26, 2009

하찮은 일이라도 맡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라

Filed under: dialog — dialoger @ 2:39 pm

신발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면, 신발 정리를 세계에서 제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그렇게 된다면 누구도 당신을 신발 정리만 하는 심부름꾼으로 놔두지 않을 것이다.
궂은 일이라도 그것에 통달하면 그때부터는 궂은 일만 하는 머슴의 세계가 아니라, 창공을 붕붕 날아다니는 도사의 세계가 열린다.

- 한큐 철도 설립자, 고바야시 이치고 -

June 24, 2009

창의적 사고에는 험난한 시련이 따른다

Filed under: dialog — dialoger @ 10:42 am

난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는 일엔 이미 이골이 났습니다.
내가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일 때마다 사람들은 만신창이가 될 때가지 그 디자인을 헐뜯고 비난했죠.
근데 그렇게 날 욕하던 사람들도 결국 내가 만든 옷을 입더군요.

- 피에르 가르뎅 -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Filed under: dialog — dialoger @ 10:41 am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처음부터 잘하는 것은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날마다 연습하면 어느 순간 너도 모르게 어려운 역경들을 벌떡 들어올리는 널 발견하게 될 거야.

- 공지영,‘아주 가벼운 깃털하나’-

June 23, 2009

우리는 길들어 있다

Filed under: dialog — dialoger @ 4:26 pm

미국 표준 철도의 철길 너비는 정확히 143.5센티미터다. 숫자가 딱 떨어지진 않지만, 영국에서 철도를 이렇게 만들었고, 이를 영국 사람들이 미국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렇다면, 영국에서는 왜 철길 너비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철도의 전신이랄 수 있는 광산의 궤도를 만든 사람이 똑같이 143.5센티미터로 철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차 궤도는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마차를 만들 때 썼던 것과 같은 도구와 자를 사용해 광차 궤도를 만들었기 때문인데, 당시 마차의 바퀴 간격이 143.5센티미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마차의 바퀴 간격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영국의 옛 도로 가운데 바퀴홈이 있는 몇몇 장거리 도로가 있는데, 이 도로의 폭에 맞추어야 바퀴가 온전할 수 있었다. 이 도로의 폭이 바로 143.5센티미터였다. 이 도로는 수천 년 전에 로마 제국 사람들이 영국에 와서 처음 만들었고, 이때 건설된 도로가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다. 당시 로마 전차가 이 도로에서 처음으로 홈을 만들었고, 이 간격이 143.5센티미터였다.

왜 로마 시절에는 이 간격을 채택했을까? 여기에도 이유가 있다. 로마 제국 전차의 바퀴 간격이 이 너비가 되어야 전투 말  두 마리를 달기에 알맞았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 표준 철도의 철길 너비 143.5센티미터는 로마 제국 전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많은 점에서 길든 채 살아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대로 선택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주어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물론 길든 채 살면 최소한 안전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유의 참맛을 알지 못한 채 안전하게 삶을 떠나게 될 뿐이다.

- 앤디 앤드루스, 폰더 씨의 실천하는 하루 -

이건희처럼 공부하라

Filed under: dialog — dialoger @ 4:24 pm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까지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이지메를 당했고, 귀국 후 고등학교 시절에는 전국 규모의 레슬링 대회에서 입상함으로써 창조적 상상력이나 리더쉽보다는 운동에 재능이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또 20세의 나이에는 “네 성격에 기업은 맞지 않은 것 같으니 매스컴은 어떠냐”는 부친의 권유를 받았다. 와세다대 유학시절 공부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야쿠자와 친분을 맺었고, 조지워싱턴대 경영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멕시코로 놀러 갔다가 비자가 만료되어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귀국하고 말았다.

삼성 비서실 견습사원 시절에는 신문에서 삼성관련 기사를 찾아 밑줄을 긋는 업무를 맡았다. 공식적인 첫 직장이었던 중앙일보.동양방송에 입사한 27세부터 미래를 준비하는 진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삼성그룹 부회장이 된 이후에도 최초로 벌인 공식적인 사업인 대한석유공사 인수에 실패했고, 말레이시아 페트로나스사와 벌인 원유공동개발, 알레스카 탄전개발사업에 연이어 실패하면서 3남의 신분으로 그룹승계를 받는다는 이유로 많은 견제에 시달리고 미국 등을 떠돌면서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1987년 46세의 나이로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제2의 창업을 선언했지만, 1992년까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때부터 체중이 10킬로그램이 줄고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미래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계기로 삼성은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 스물일곱살 이건희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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